눈먼 바디매오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.. 바디매오는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는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.
. 사람들 “지나가시는 나사렛 예수“말해 주세요. 나사렛 예수는 수많은 추종자들과 파수꾼들에게 거리의 소음이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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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사렛의 유대인 ‘좋은‘날 수 없다고 말해. 이것이 영생을 구하는 부자가 예수님께 붙인 칭호입니다.
‘좋은 선생님‘ 대기줄(좋아요)역시 같은 맥락이다.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행위입니다.
. 너무 부자 ‘무슨 좋은 <행동>해야 할 것…‘그는 묻는다. 그래서 예수 “왜?수사학적 질문. 문제는 내가 세상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왜 내가 좋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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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준은 영생을 구한 부자의 마음, 혹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마음입니다.
. 기대하는 자의 기준, 평론가의 기준은 영생을 구하는 부자의 기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을 축복하시도록 하는 행위입니다.
. 민족독립이나 가난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든,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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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을 따르던 바르티매오 주변의 군중들, 서서 지켜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이런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.
. 하나님은 당신의 비천함과 가난을 축복합니다, 하나님의 선하심이 없는 가난한 나사렛 예수가 그들의 기준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인지 보십시오.. 그게 기준이니까 jesus ‘좋은 선생님‘불러라‘나사렛 예수‘~로 알려진.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는 그분을 세상에 행복을 주시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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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바디매오는 다릅니다.
. 그는 육안으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.
, 하나님의 왕 다윗의 자손이라 일컫는다.
. 육신의 눈을 뜬 사람들은 육신의 일이 세상에 선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.
,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디매오는 육신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.
, 이로 인해 저는 하나님의 메시야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즉시 보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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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들은 예수를 “나사렛 예수”라고 불렀으나 바디매오는 예수를 “다윗의 자손 예수”라고 불렀습니다.
예수 ‘나사렛 예수‘바디매오는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끄럽다.
“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“나는 조용히 그를 꾸짖었다.
. 그러나 그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.
예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.
. 큰 그룹에서도 여전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.
.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시고 부름을 들으셨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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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제는.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바디매오는 외투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.
. 맹목적으로 달리는 것은 자살이다. 장애물을 보지 않고 달리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.
. 더군다나 그토록 많은 부딪힘과 넘어짐과 상처를 겪은 후,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던 그는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외투를 던지고 말씀을 들었다.
, 큰 믿음.
예수가 바르티매오에게 ‘당신의 믿음을 저장‘이것은 믿는 것이다. 위험을 무릅쓰는 용감한 행동이나 모험으로 이끄는 마음만은 아니다.
. 믿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시며 그를 비참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.
. 그래서 예수를 눈으로 보는 믿음이 예수가 누구인지, 이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. 예수님을 바로 알았기에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.
소경이 보는 것을 앞서 말한 선이나 육신의 복이라고 합니다.
, 그것을 본 후에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고, 예수님이 칭찬하신 믿음은 나사렛과 관련이 있었습니다.
, 부와 영생과는 거의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.
.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호소하는 후회는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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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께서 이 몸에게 이르시되 “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“설명하다.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믿으라, 이것이 구원이다.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황금 병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면, 또는 자신의 힘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가난을 해결했다면,,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.
.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, 겸손한 나사렛 사람 구유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겸손하고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.
.. 그러나 예수님은 바르티매오를 통해 그것이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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